주체성과 타자성 연구

주체성과 타자성, 로렌초 키에자(Lorenzo Chiesa), 이성민 역, 도서출판 난장, 2012


차례

서론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1부. 상상적인 것(타자)의 주체


1장. 상상적인 것(타자)의 주체

1.1. 서론: 주체와 자아
1.2. “나는 타자이다”: 이미지와 거울단계의 (탈)형성적 기능
1.3. 애증, 이상적 자아와 자아이상
1.4. 의식, 무의식, 그리고 콤플렉스


제2부. 상징적인 것(타자)의 주체


2장.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

2.1. 서론: 소타자에서 대타자로
2.2. 말의 기능
2.3. 메시지 개념
2.4. 기표, 기의, 문자


3장. 은유로서의 오이디푸스

3.1. 서론
3.2. 좌절 이전의 신화적 단계, 그리고 원초적 좌절
3.3. 좌절의 변증법,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첫 (“전오이디푸스적”) 단계
3.4.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들
3.5. 성구분과 여성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3.6. 부성적 은유, 아버지의-이름, 그리고 남근
3.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무의식의 탄생


제3부. 실재(적 타자)의 주체

4장. 타자의 타자는 없다

4.1. 서론
4.2. “타자의 타자는 있다”로부터……
4.3. ……“타자의 타자는 없다”로
4.4. “실재”란 무엇인가?


5장. 환상의 주체 …… 그리고 그 너머

5.1. 환상의 주체와 죽음충동의 기능: 개관
5.2. 환상의 주체와 욕망
5.3. 환상의 주체와 대상 a
5.4. 순수 욕망, 향유, 그리고 정신분석의 윤리
5.5. j'oui's-sens, jouis-sens, jouis-sans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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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상상적인 것(타자)의 주체



1장. 상상적인 것(타자)의 주체


자아는 상상적 타자(주체의 거울이미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동일시적 소외이다. 타자 안에서의 주체가 상상적으로 소외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의미에서 주체에게 상상적 동일성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형태발생적” 기능을 가진, 주체의 심리에 (탈)형성적 기능을 발휘하는 어떤 이미지들(이마고) 때문에 가능하다. 상상적 동일시는 심적으로 인과적인 것이고, 이로 인해서 이중적 오인이 발생한다. 자아는 타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소외된 바로서 인지하지 못하고 어떤 동일성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주체는 왜 자기 신체의 이미지에 사로잡히는가? 여기서 라캉은 게슈탈트 이론의 주요 내용을 수용한다. 재생산은 상상적인 것의 매혹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는 왜곡된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이것은 인간 유아의 기원적인 무기력과 관련이 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거울이미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동일시에는 필연적으로 소외가 부과되며, 주체는 소외적 이미지의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영원히 획득하지 못한다.


이 소외적 동일시는 유아가 거울이미지의 완전성에 매혹되고 이어서 자신의 실재적 신체의 파편화를 인지하면서 급속하게 재촉된다. 이렇게 해서 자아의 원초적 기반인 원-자아가 최초의 정신적 대상으로서 정초된다. 여기서 이상적 이미지는 이상적 자아이다.

원-자아는 나르시스적인 자기 이미지와 항구적으로 경쟁하고, 이 지점에서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은 동일한 지향이 된다. 자아는 공격적으로 타자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한에서 타자를 사랑한다. 더 발전된 자아 형태가 반복된 내사를 통해서 출현하게 되면 주체는 상상적 타자를 타자로 인지한다. 이 부분은 라캉의 초기 사유에서 애매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상적 자아의 지속적인 투사는 모든 외부 대상들에 대한 (오)파악을 조건짓는다. 이상적 자아가 외부 세계로의 이상적 이미지의 투사를 의미한다면 자아이상은 주체가 그의 정신에 새로운 (탈)형성적 이미지를 가져오는 또 다른 외부 이미지를 내사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에게 이차적 동일시를 제공하는 새로운 층을 덧붙인다. 여기서 외부 이미지는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이마고이며, 주체를 법의 상징적 평면으로 진입하게끔 하여 자아의 공격적-나르시스적 유아론을 완화시킨다.


이제 이상적 자아는 자아이상에 의해 재형태화되는데, 이는 사랑의 개념과 심대한 관련이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이상적 자아가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투사되도록 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나르시시즘과 상상적 사랑의 개념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언명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의 욕망이란 타자 속에 있는 욕망이거나, 자아가 타자에 대해 지니는 욕망이다. 그런데 이는 또 하나의 원초적인 욕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나의 원-자아의 자리를 차지한 타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타자 이미지의 원초적인 무의식적 투사·표상 이후에 원-자아가 형성되고, 이러한 점에서 이마고는 주체에 의해 산출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라캉은 무-의식은 자기의식이 아니며, 일반적으로 심적 활동은 무-의식적인 것이고 지향적인 경우에 한정해 자기의식적이라고 말하면서 프로이트적 지각-의식 체계 자체는 무-의식적이고 지향적인 본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대상으로서의 자아의 불투명한 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식은 온전히 자기에게 현전하는 의식이 아닌 타자와의 소외적 동일시를 통하여 달성되는 것이고, 이 자기의식과 무-의식적 지각으로서의 순수지각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산물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다.

이마고의 (탈)형성적 힘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상호개인적 관계의 근본적인 무의식적 구조, 콤플렉스 때문이다. 무의식이 갖는 그 자체로 복잡한(complex) 논리이다. 라캉은 「가족 콤플렉스」에서 세 가지의 기초적이면서 연속적인 콤플렉스에 대해서 논한다.


떼기 콤플렉스 → 유아는 젖가슴 이마고를 통해 떼기 콤플렉스에 진입하면서 지속하고자 하는 먹이기 관계를 확립한다. 동시에 유아는 그 자신이 타자 안에서 구제불가능하게 소외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침입 콤플렉스 → 상대방 이마고와의 소외적 동일시를 통해서 진입하는 이 콤플렉스에서, 그의 해소를 통해 유아는 타자를 타자로 인지하는, “자기”-의식적인 자아를 획득한다. 라캉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데 실패한다. 여기서 상상계 내적인 “동일시적 질투”는 모든 사회적인 감정의 원형이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불충분?) 근친상간 금지, 자아이상의 원천인 아버지 이마고와의 소외적 동일시와 그에 따른 법의 출현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보편적으로” 해소된다. 그 결과로 자아이상과 억압적 심급으로서의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주체의 심적 발달 과정은 변증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생물심리적인 위기가 있고, 이어 콤플렉스가 도입되며 종내는 콤플렉스가 해소되는데, 이 콤플렉스의 해소가 새로운 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콤플렉스는 심적 발달의 특수한 단계의 전개를 가능케 하는 종합(지양)이고, 이는 반테제·부정으로서의 위기 이후에 일어나고 새로운 반테제로서의 “더 높은” 위기 이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탄생의 미성숙 → 떼기 콤플렉스(젖가슴 이마고와의 상상적 동일시) → 좁은 의미에서의 젖떼기 → 침입 콤플렉스(주체와 거울이미지가 형성하는 공격적·나르시스적 관계) → 좁은 의미에서의 침입(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인정, “자기”-의식적 자아의 획득)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성 부모에 대한 사랑과 동성 부모에 대한 적대) → 거세 위협에 의한 근친상간 금지 → 아버지 이마고와의 동일시(자아이상의 내사)


인간은 탄생의 미성숙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상상적 소외를 결코 극복해내지 못하기에 적응에 실패한 동물로 남게 되지만, 심적 역량의 탁월함이 이를 보충하게 된다. 자기파괴적인 자아 리비도의 재정향으로서의 재적응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며, 라캉은 원초적 나르시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시즘을 구별하고 그 둘이 상이한 두 형태의 리비도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성적 리비도)은 게슈탈트들에 의존하고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유효하고, 이차적 나르시시즘(자아 리비도)은 인간 신체의 게슈탈트들에 산출된 소외적 동일시의 결과이다. 여기서 모든 리비도는 게슈탈트의 상상적 기능에 의존하는 한 본질적으로 나르시스적인 성격을 갖고, 여기서 인간은 자아 리비도의 자기파괴적인 경향을 극복하는 한에서 성적 리비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문화적인 동시에 구조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친상간 금지는 문화의 보편적인 법으로서 문화에 보편적 구조를 제공하고, 그의 전달은 계통발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세히?)



제2부. 상징적인 것(타자)의 주체



2장.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


“소타자에서 대타자로”라는 표어는 라캉의 사유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전환점을 효과적으로 포착해낸다. 대타자는 구조로서의 언어, 인간 문화의 법적 짜임새로서의 상징적 질서, 라캉이 재정식화한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세 꼭짓점으로 갖는 무엇이다.


주체성의 개념과 관련해서 라캉은 이제 “자아는 타자이다”에서 “나는 타자이다(I is an Other)”라는 공식으로 그 관심을 전환한다. 이제 주체는 타자의 주체와 적극적으로 동일시되는데, 이는 언어의 주체, 상징계의 주체, 무의식적 주체라는 세 가지 측면을 갖는다.


라캉에게 무의식의 주체란 무의식적 주체, (자기)의식의 심급에 대립되는 심적 심급이자 무의식에 종속된 주체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의식적 주체는 타자로서의 언어와 인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무의식적 구조(타자)에 부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일상의 의식적 경험이, 주체가 언제나-이미 언어 속에 잠겨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로서 주체는 “이중적 소외”를 겪는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타자의 주체에 대한 라캉의 이론적 견해가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라캉은 이제 언어 속으로의 소외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하는데, 여기서 언어(language)와 말(parole)의 관계가 증폭된다. 그는 언어가 주체에 선행하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매개하는 한, 주체는 언어 속에서 소외된다고 논증한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필연적으로 그러한가?


우선 주체는 그의 욕망을 말로 충분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대화자는 주체의 의식적인 의도(지향)을 넘어선 어떤 것을 주체의 말에서 읽어낸다. 프로이트 이전에 이루어졌던 지향성과 의식의 등치는 의식을 의미작용에 내속하는 것으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캉은 이러한 논박을 기초로 “언어의 벽”의 존재를 추론해낸다. 이제 언어에 귀속되는 진술의 주체와 충만한 말에 귀속되는 언표의 주체가 구분된다. “언어의 벽”은 상상적 소외가 언어적 층위로 옮겨진 것이고, 진술의 주체(주어)는 자아의 언어적 상대물을 의미한다. 라캉은 이렇게 언어 속에서 소외된 말을 ‘공허한 말’이라 지칭한다.


주체는 말하는 한에서만 주체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분열되고, 진술 속에서 현전하지 않으나 진술에 의해 전제되고 불러내어지는 언표는 주체 안의 “또 다른 장면”, 무의식의 주체를 가리킨다. 이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라캉이 말하길,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관계이다.


「기능과 장」에서 라캉은 언어 속에서의 주체의 소외(공허한 말)가 충만한 말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의 공허함 너머에서 주체는 (그의 억압된 특이적인 무의식적 욕망이 타자(인 주체)에 의해 인정될 수 있도록) 자신의 무의식과 끊임없이 말하고 있으며, 이렇게 인지되지 못하는 말을 주체가 온전히 떠맡는 것이 충만한 말이 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는 상징적인 상호주체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러한 1950년대 초반 라캉의 상징계 개념은 인정욕망에 대한 헤겔-코제브적 원리를 그 토대로 갖고 있다. 하지만 충만한 말을 통한 이러한 낙관적 해결책은 이후 라캉이 (무의식을 실체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진한 견해와 일부 모순된다.


라캉은 충만한 말과 공허한 말의 개념을, “발신자는 그 자신의 메시지를 수신자로부터 역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라는 언명과 연결시킨다. 이는 우선적으로 발신자(주체1)는 언제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동적으로 수신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메시지에 부과되는 ‘역전’이 무엇인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상호주체성의 차원에서, 공식은 다른 무의식적 주체2로서의 타자가 보내는 상징적 메시지가 필연적으로 자아-타자 관계의 상상적 역전을 통해서 주체1에 의해 수신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주체가 전락해 있는, 언어 속으로의 소외이다.


이러한 부정적 의미로서의 역전 이외에 긍정적 형태로 그것이 해석될 수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는 분석 상황에서 분석가가 상상적 상대방의 위치 점유를 포기함으로써 “언어의 벽”을 중지시키고, 분석자로 하여금 자신의 충만한 말(무의식적으로 억압된 메시지이자 자신의 욕망)을 떠맡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이는 정신분석적 상황의 외부에서도 타당한데, 여기서 주체는 일상생활에서 타자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수신하지만 이를 떠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주체의 메시지를 비의도적으로 주체에게 되돌려 보내는 타자는 누구인가? 이는 “내 안에 있는 타자”로서의 무의식(내부주체성)도, 다른 개체의 무의식(상호주체성)도 아닌 초개체적 무의식이다.


이 개념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화이다”라는 언명을 해석할 때에 있어서 중요한 반향을 낳는다. 타자가 다른 개별적 주체의 무의식을 의미할 때 전술한 공식은 주체의 무의식이 개별 주체들이 그에 건네는 말의 산물임을 의미하지만, 타자가 비개체화된 장소로서 이해될 때 주체의 “개체적” 무의식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언어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라캉은 주체의 실체 없는 무의식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 주체를 어떤 실체적 구조 속으로 전적으로 탈주체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억압의 완벽한 극복이 개체적 무의식과 자기의식을 소실시키는 것이다. 라캉은 이후 언어학적 개념을 통해서 언어로서의 타자를 재평가하고 나서야 이러한 교착 상태를 인지하게 되고 원초적 억압의 중요성을 논하게 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두 개의 상호의존적인 요소, 지시체가 나타내는 실재적 대상이 아닌 개념적 요소에 상응하는 기의와 음운론적 요소에 상응하는 기표로 이루어진다. 기표와 기의는 일대일대응하며, 언어는 모든 기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적 대립을 통해서 하나의 기호에 내속하는 의미작용이 산출되는 체계이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는 임의적으로 대응한다.


라캉은 이러한 기호 개념을 채택하면서도 세 가지 근본적인 측면에서 이를 전복한다. 기표는 논리적으로 기의에 선행하며 기의의 원인이다. 여기서 의미작용은 기표들의 연쇄가 기의를 발생시키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는 일대일대응하지 않는다. 이어서 라캉은 기표적 단어들은 문장이 완결된 이후에서야 소급적으로 의미작용을 생성함을 지적한다. 기표 위에서 기의가 미끄러지기 때문에 주체는 분열되고, 기의에 의해서 체험의 연속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복에 뒤이어 라캉은 기표, 기호, 주체의 개념에 대해 상호연결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기표는 어떤 대상이 아닌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 기호이며, 그 자체로 또 다른 기표의 부재를 의미화하는 기호이다. 기호는 지표와 지시대상의 상상적·게슈탈트적 관계, “생물학적 기호”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체성은 순수하게 의미작용적인 목적을 위해 기표를 취급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유래하는 그 무엇으로 정의된다.


무의식 속에서 의미작용 사슬들은 어떻게, 어떤 언어적 법칙들에 따라 의식적 의미작용을 산출하는가? 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야콥슨은 환유와 은유 개념을 말이 전제하고 있는 두 가지의 기초적 절차, 선택과 조합으로부터 설명한다. 대체(선택)의 축은 수직적이고 공시적이며, 조합의 축은 수평적이고 통시적이다. 그리고 수직축을 은유, 수평축을 환유라는 수사학적 용어로 명명한다.


라캉은 이를 (의식적)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무의식이라는 테제에 적용하는데, 야콥슨에 따르면 은유의 수직축이 부재 속에서 유지되고 환유의 수평축이 현존 속에서 유지된다면 라캉에 와서 환유는 현존 속에서도, 부재 속에서도 유지된다. 수직적 연합 내에 이미 어떤 환유적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라캉은 이 은유와 환유 둘 다로 이루어지는 수직축의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무의식의 현행적 현실성을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무의식적 환유는 언어의 수직적·공시적 축에 맡겨지는데, 이는 인접성에 의한 조합적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은유적 대체에 의해 어떤 특정한 지점에서 말의 의식적·통시적·수평적 축에 연결된다. 여기서 무의식적 환유가 은유에 의해 끊임없이 파편화되고 재정향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은유와 환유가 어떻게 새로운 의미작용을 산출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기의의 연속적인 환유적 흐름은 하나의 통시적인 직선 사슬을 이루고, 이와 별개로 무의식은 은유적 대체로 인한 다중의 공시적 사슬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연관을 입증해주는 것이 무의식적 형성물이다. ‘무의식적 의미’는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의미작용이고, 이러한 것의 현실화가 무의식적 형성물에 의해서 제공된다. 이는 무의식 안에 기표들의 구조적 배열, 무의식적 의미가 현존해야만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기표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 이중적으로 기입된다. 그리고 이는 본능적 필요에 대한 욕망≒요구가 비조직화된 소리를 사용한 직후에 신화적으로 발생하는, 원초적 억압의 결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특정한 기표의 억압은 곧 무의식적 의미작용 사슬을 재정향하는 은유적 대체를 야기한다.


라캉은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를 종종 “문자”로 정의한다. 문자는 음소의 기입된 물질화이고, (의식적) 의미작용의 효과와 무관하게, 무의식 안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바로서의 기표‘이다. 이는 개별 주체가 능동적으로 상징계에 참여하는 것과 무관하게 주체에게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라캉의 진술, “모든 실재적 기표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표이다”는 기표는 의미적인 것이 아닌 다른 모든 기표들과의 차이적·대립적 관계에서 고려될 때에만 의미화한다는 것, 또는 그들을 의미작용 효과로부터 분리시켜서 사고할 때 그들이 하나의 집합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는 문자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독해할 수 있다.


3장. 은유로서의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다음의 선험적 가정들에 기초한다. 유아는 언제나-이미 언어로서의 타자 안에 잠겨 있고, 이 언어로서의 타자는 상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상징적 관계들은 계통발생적으로, 즉 유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런 전제들 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모든 쟁점은 처음에 언어 속에 수동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타자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비-주체인 전오이디푸스적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함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점진적으로 상징화한다는 점에 놓여 있다. 여기서 전오이디푸스적 과정들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상징화된다.


또한 아이에게 전오이디푸스적 원상징화들이 주어지더라도, 즉 아직 아이가 상징계로서의 타자에 진입할 수 없더라도 언어로서의 타자에 능동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갖는 사후적 성격은 전오이디푸스적 무의식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고유의 개체화가 있어야만 고유의 억압이 가능해지고, 자기의식의 출현이 동반되어야만 무의식은 고유하게 명명될 수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캉적 재해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개별 주체에게 문화의 법으로서의 상징적 질서에 진입하게끔 하고, 이는 오직 주체가 남자나 여자로서 상징적 위치를 떠맡아야만(즉, 성별화되어야만)가능하다. 기표 아버지의-이름은 기표 어머니의-욕망을 대체함으로써 아이가 남근적 의미작용을 개시하게끔 한다. 그리고 아이는 세 번의 상이한 “위기”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연속적인 오이디푸스의 세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매번의 위기는 주체가 어떤 변별적 대상의 변별적 결여를 떠맡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상징계의 (능동적) 일부로서 어머니는 언제나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고, 따라서 욕망하는 존재이다. 아이 또한 상징계로의 진입 이전에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라캉은 아이가 그 무엇도 결여하지 않는 신화적 순간을 설정한다. 아이는 아직 대상으로서 지각되지 않으나 “실재적”인 젖가슴과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 있고, 라캉은 “실재적” 대상을 그것의 “행위자”인 어머니와 구분한다. 이 (상징적) 어머니는 그녀의 현존과 부재의 대립 와 동일한 것이고 아이는 호소/울음의 절분을 통해서 이를 지배한다. 라캉은 이 절분을 상징계 안으로의 진입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라캉은 아이가 대상과 원동물적이고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시간 0을 행위자로서의 어머니의 교차적인 현존/부재와 마주하는 시간 1과 구분하는 데 실패한다. 대립 는 한층 더 기원적인 구분에 불가피하게 의존하며 따라서 라캉의 원초적 좌절보다 더 이른 좌절이 있을 수도 있다. 이를 탄생(의 외상), 즉 분할/분만에 의해 제공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신화적 상태에서 어머니가 아이의 호소를 소홀히 하게 되면 어머니는 실재적인 것으로 되고, 이전까지 생물학적 필요를 만족시켜주던 (잠재적) 대상들은 에 기초한 “선물”이 되며 이는 “호의적 권력”을 상징한다. 즉 실재적 대상은 상징적이 됨으로써만 이전의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여기서 라캉은 대상 결여의 처음 형태를 좌절이라고 명명하고, 보다 특별하게는 상징적 행위자를 갖는 실재적 대상의 상상적 결여로 정의한다. 여기서 결여가 상상적인 이유는 일상 현실에서 대상화되는 모든 실재가 언제나 상상적 내사와 투사를 통하기 때문이다. 결국 원초적 좌절에 의해 개시된 아이-대상 관계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스적이다.


원초적 좌절은, 그 좌절을 뒤따르는 어머니와 아이, 어머니가 아이의 호소에 답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엇 사이의 삼각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확립한다. 아이는 생물학적 필요를 넘어서 어머니로 하여금 무조건적으로 그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어머니는 발기된 음경의 이미지로서의 남근을 욕망하는 존재이고 이대 아이는 잃어버린 상상적 남근의 대체물이 되는 한에서 그녀의 필요를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은 아이에게 그대로 인지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남근기”에 최초로 성차가 파악된 이후에야 아이는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되고, 나아가 이 깨달음의 시기는 유아자위의 출현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성차의 파악은 실재적 어머니에게서 남근으로의 아이를 박탈하는 상상적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아이는 아버지의 신체 이미지에 대해 상상적인 소외적 동일시를 수행함으로써 나르시스적-공격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는 아이가 남근적 게슈탈트와 관계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며, 이는 아이가 성차를 최초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실재적 상관물이 전적으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는 불안을 초래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첫 단계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이는 어머니가 (상상적)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원초적 좌절 때문에 어머니는 욕망하는 타자(어머니의-욕망)로 경험되지만 어느 시기까지는 이 타자가 상상적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고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는 어머니의-욕망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이렇게 되는 연유는 아이가 이중적인 상상적-소외적 동일시를 수행하기 때문으로, 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그 대상들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전능함이 종결되고, 아이에게는 어떤 “근본적인 실망”이 산출된다.


상징적 대상을 주체에게 있어서 무엇을 함축하는가? 원초적 좌절 이후,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 걸려 있는 것은 “실재적 대상이 아닌 오히려 상징적 대상을 줄 수 있는 자의 사랑”이다. 이렇게 아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상징화한다. 하지만 상징적 대상을 발생하게 하는 전체적 사슬, 어머니가 댓가로 바라는 어떤 특별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원상징화의 결과로, 아이의 (사랑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만족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에 대한 라캉의 유명한 정의, 사랑하는 사람에 있어서 “누군가가 한 존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무엇임 너머에 있으며, 결국에는 그녀가 결여하는 어떤 것이다.”와 사랑받는 사람에 있어서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기증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징표는 없다.”가 정식화된다. 이 공식은 아이와 어머니 모두에게 적용되고, 여기서 양자 모두가 갖고 있지 않으면서 주는 것은 바로 남근이다.


좌절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제 아이는 “청구”를 시작하면서 대상과 상상적-나르시스적 관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사랑의) 상징적 좌절에 의존한다. 그리고 필요를 만족시키는 한에서 실재적 대상의 가치는 사랑의 좌절에 대한 ‘보상’에 있다. 이렇게 새롭게 고안된 것으로서 실재적 대상은 리비도에 상징적 질서의 영향을 가한다.


또한 라캉은 실재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실재적 대상이 (결여된) 상징적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단어들에 대해 적용했을 때 아이가 어떻게 말하기를 배우는지에 대한 가설을 수립한다. 어머니의 상징적 말이 사랑의 결여를 보상해주는 실재적 대상으로서 아이에게 “집어삼켜지고” 초자아가 최초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좌절에 앞서 수동적 무력감을 나타내는 기표로서의 울음과, 항구적인 좌절에 맞서 아이의 현존을 개시하는 기표로서의 요구를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 (추가?)


박탈은 상징적 대상(남근)의 실재적 결여이다. 상징화에 선행하는 “잠재적 실재”에서 여자는 그 무엇도 결여하지 않는데, 이는 상징적 변증법 의 내부에서 여자가 상징적 남근을 결여한다는 것()이 상징적 남근()만큼 실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될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박탈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성구분을 떠맡게 된다. 더 나아가 (상상적) 아버지는 남근으로서의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박탈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의 유일한 대상이라는 아이의 믿음을 일소한다.


그런데 이러한 근친상간적 관계의 금지는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지는가? 논리적으로 이는 어머니와 아이 자신이 남근을 결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어머니의 남근에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아이의 시도와 동시에 이루어진다. 변증법적 좌절의 과정 동안에 아이는 남근적 게슈탈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아이가 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들()은 언제나 결여()를 배경으로 해서 주어지고, 이러한 이중적 동일시는 어머니가 실제로 남근/음경을 욕망하고 아이가 그 직접적인 시도를 행할 때 종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박탈에 대해 이루어진 설명들을 종합해보면, 아이가 남근적 게슈탈트에 사로잡히는 계기는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의 금지된 대상으로서의 남근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계기와 일치한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근친상간 금지는 아이의 음경 사용과, 상상적 기표로서의 남근(남근적 게슈탈트)의 순환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박탈 이후에 아이는 어머니에게 남근적 게슈탈트(상상적 남근)으로서 자신을 제공한다. 아이는 어머니의 결여의 인지를 잠시 동안 회피할 수 있었으나 ‘금지’가 그 다음 단계를 개시하고 나서는 그렇지 못하게 되고, 동시에 일깨워진 자신의 실재적 남근으로 자신이 욕망되기를 바라는 제스처인 유아자위를 수행하게 된다.


어머니는 박탈 이전부터 아이를 상상적 남근으로서 항상 욕망해왔지만 결코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고, 그렇기에 남근의 특권적 체현물인 아버지의 음경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제 법이 금지하는 바로서의 아이의 음경 제공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 또한 상상적 남근으로서의 아이를 포기해야만 함을 깨닫게 한다. 어머니는 이미 법에 의해 내면화되어 있기에 박탈은 “어머니에 의해 매개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추가?)


상징적 법(아버지의-이름)이 어머니를 통해 (이미)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몇 가지 논점들을 명료하게 할 필요가 있다. 법이 어머니에 의해 “매개되어” 있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법은 어떻게 어머니가 박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이로 하여금 지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그리고 아버지의 심급은 오이디푸스의 첫 단계 동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좌절의 변증법은 그 자체로 상징적 법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베일에 가려진” 형태는 이후의 “매개된” 형태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두 번 박탈당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구분을 획득하는, 말하는 존재로서의 여자의 첫 번째 박탈, 의 변별에 의해 생성된 상상적 결여와 자신의 상징적 결여를, (상징적이자 상상적인) 남근과 아이를 등치시킴으로써 보상하려고 시도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자의 두 번째 박탈.


콤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를 극복하게끔 하는 것은 거세이고, 이는 실재적 아버지의 개입과 일치한다. 이로써 아이는 남근이 되고자 하는 시도가 소용없음을 깨닫게 되고 실재적 아버지와 그 자신을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데, 이는 자아이상의 출현을 표식한다.

콤플렉스의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아이는 아버지가 남근/남근적 게슈탈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직 세 번째 단계에 가서야 아이는 박탈을 온전히 상징화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은 거세를 상상적 대상의 상징적 결여로 정의한다. 먼저 이는 법의 부과와 갚음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가 있는데, 아이는 아버지가 남근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 자신이 남근이어야 한다는 과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아이가 남근의 배타적 귀속을 인정하면서 실재적 아버지가 그 행위자로 있는 상징적 법의 영역에 능동적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남근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부성적 게슈탈트와 그 자신의 불완전함 사이의 비교를 통해, 아이가 나르시스적 소외에서 동일시하고 경쟁하는 것이 곧 상상적 대상(남근)이다. 여기서 아이가 동일시하는 대상은 부성적 게슈탈트이지 그것의 담지자인 아버지는 아니다. 또한 이 경쟁은 상징적 동일시의 전제조건이다.


여기서 상징적 질서는 그 자체로 상상적 차원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적 동일시를 촉진하는 (아버지와의) 상상적 동일시는 단지 이상적 자아의 내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이름,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상징적 떠맡음을 함축한다.

자아이상은 부성적 게슈탈트(이상적 자아)와의 상상적 동일시에 의존하고, 동시에 상상적 요소들이 상징계 안에서 안정을 취하게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이상은 타인들이 (상징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내가 (상상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적 반성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상적 자아)에 상징적 형식을 제공한다.


또한 상상적 동일시만으로는 상징적 동일시와 그에 따른 자아이상의 출현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실재적 아버지가 출현하여 원상징적 대립적 연쇄 를 묶어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법의 체현물인 실재적 아버지는 “부성적 기능”으로서의 상징적 아버지와 근본적으로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또 다른 근본적인 구분 또한 설명한다. 상징적 대상은 그것이 어떤 우연한 상상적 대상의 형태로 (선물로서) 현존할 때 부재하는 것으로, 또한 그 상상적 대상이 부재할 때 출현한다. 그러므로 상상적 대상은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상징적 대상 의 변증법에서 연원할 수 있다고, 이 두 대상을 구별짓는 것이다. 이제 대상은 어머니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상상적 대상이 아닌, 타자가 언제나 그 아이의 불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게 하는 부분적 대상이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 해소)가 아이에게 있어서 상징적 질서로의 능동적인 진입을 의미한다면, 이는 또한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규범의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 또한 함축한다. 그런데 이는 왜 그러한가? 무엇보다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의 “자연적”인 결핍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하게는, 상징계는 (재생산적인) 인간 성관계가 일어나기 위한 가능성의 구조적 조건을 구성한다는 사실에 있다. 탄생의 미성숙과, 타자의 신체 이미지 안에서의 나르시스적 소외로 인한 “무질서한 상상력”을 상징적 영역으로 덧놓아야만 종의 생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검토를 요하는 부분이 남아 있는데, 고유한 성구분을 위하여 거세만이 필요한 남자와 거세와 박탈 모두를 겪는 여자에 대한 것과, 성구분에서 남근적 게슈탈트의 상상적 측면과 상징적 측면이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제3부. 실재(적 타자)의 주체


4장. 타자의 타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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